01. 계약을 해지했더니 사해행위로 취소하라고 한다면?
이 사건의 발단은 국내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부도가 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업체의 부도로 더 이상 공사 진행이 어렵게 되자, 대기업이었던 원청은 하청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하였는데, 하청업체의 재하청업체가 위 계약 해지는 사해행위라며 원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던, 다소 흥미로운 사건이었습니다.
재하청업체(이하 '원고')의 주장을 정리하면 이러했습니다.
① 원고는 하청업체로부터 받지 못한 재하도급 대금이 있다.
② 그리고 하청업체는 원청(이하 '피고')에게 받아야 할 기성고 대금이 있다.
③ 그런데 하청업체와 피고가 서로 짜고 기성고 대금을 정산하지 않은 채 계약해지를 해버렸다.
④ 즉, 하청업체는 피고로부터 기성고 대금을 받아 이를 다시 원고에게 재하도급 대금으로 지급하여야 했는데 이를 회피하였으므로 사해행위에 해당한다.
이를 종합하면, 피고는 하청업체에 지급했어야 할 기성고 대금만큼 경제적 이익을 본 셈이므로, 수익자로서 원고에게 재하도급 대금 상당의 금원을 지급하여야 한다는 것이 원고 측의 주장이었습니다.
02. 만약에 기성고 대금이 인정되면 어떻게 되나요?
피고 측은 저와 사건 상담을 하면서 연신 걱정을 했습니다. 자칫하다가는, 기성고 대금을 줘야 함에도 이를 주지 않은 대기업의 갑질인 것처럼 사건이 비화될 것을 우려하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원고 측은 지금 프레임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건은 '기성고 대금이 있든 없든, 이를 지급하지 않기로 당사자들이 합의한 것 자체가 과연 문제가 되는지'부터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이 정말로 문제라면, 실제 기성고가 남아 있었는지를 다투는게 순서일테니까요. 저는 원고 측이 자명한 진실인 양 전제를 하고 있는 논리의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로 했습니다.
03. 사적자치의 원칙과 채권자 보호의 우열 관계
사해행위 취소는 ① 피보전채권의 발생, ② 사해행위의 존재, ③ 수익자의 악의 ④ 제척기간 내 행사 등을 요건으로 합니다(민법 제406조).
그런데 이 사건은 앞서 본 바와 같이, "양 당사자들이 기성고를 정산하지 않기로 서로 합의한게 도대체 왜 사해행위에 해당하나?" 는 의문이 선결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 "② 사해행위의 존재" 여부가 핵심이었던 것이죠.
한편, 우리나라는 "사적 자치의 원칙"을 민사의 대원칙으로 두고 있습니다. 헌법 제10조, 제37조 제2항, 민법 제103조 내지 제105조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해석과 판례 등에 의하여 민법상 기본원리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러한 사적 자치의 원칙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령규정을 위반한게 아니라면, 당사자간 의사표시는 그대로 유효하다"는 원칙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기성고를 정산하지 않기로 합의한 행위"가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령규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면" 피고와 하청업체 간 기성고 미정산 합의는 유효하고, 사해행위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04. 핵심 논점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
저는 여러 법령과 판례, 논문 등을 리서치하면서 저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가령, 건설산업기본법 시행규칙에서는 기성고 미정산 합의의 방식을 도리어 법으로서 정하고 있었고, 단순한 재산의 증가를 거부한 행위는 사해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대표적인 대법원 판례도 인용해봄직 했습니다.
즉, 기성고 정산을 하지 않기로 합의하는 행위는 법에서도 예정하고 있는 행위로서 만일 이를 사해행위로 본다면 법이 사해행위를 규정한 것이 되어 부당하고, 하청업체가 기성고 채권을 취득하기 위하여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이를 단순한 재산의 증가를 거부한 행위로 보더라도 사해행위에 해당할 수 없으며, 결국 기성고 미정산 합의는 사적 자치의 원칙에 따라 피고와 하청업체가 정하기 나름인 사안이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원고 측이 내세우는 법리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원고 측이 인용하는 각종 판례는 이 사건과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들면서 적극적인 변론을 이어나갔습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재판부의 원고 소 취하 화해권고 결정으로 종료되게 되었고, 피고 측은 우려했던 사태에 대한 걱정을 말끔하게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05. 소송은 생물입니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집중하여야 합니다.
소송은 대부분 둘 이상의 당사자가 대립하는 구조입니다. 즉, 어느 한 편의 말만 듣고 판단을 하는 절차가 아니기 때문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사건이 종종 흘러가곤 합니다.
이럴 때면 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사도 깊은 시름에 잠기곤 합니다. 확인된 사실관계가 달라지면 그 동안 쌓아온 주장과 근거가 무용지물이 되기도 하고, 상대방의 강력한 증거 한 방에 전세가 바로 역전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송은 생물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건도 무려 3년의 시간 동안, 원고의 주장이 계속해서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원고의 청구취지가 변경되는 과정도 있었습니다. (맨 처음 원고는 사해행위취소가 아닌, 하도급법에 따른 직불대금청구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변호사에게는 수 많은 사건 중 하나겠지만, 의뢰인에게는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건이 바로 송사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 결과가 나올 때까지 변치않는 관심과 집중력으로 사건을 케어해 줄 수 있는 변호사를 찾으셔서 분쟁의 원만한 해결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하도급분쟁, 사해행위 등으로 곤란을 겪고 있다면 법률전문가의 도움을 받으세요. 다년간 로펌, 대기업에서 수많은 분쟁들을 해결한 실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최적의 법률 솔루션을 제공해드리겠습니다.